냉전시대 뛰어난 수학자 에드리시의 삶

냉전시대 뛰어난 수학자 에드리시의 삶을 알아보겠다. 에르디시의 선생님이자 친구인 리포트 페예르를 기념하는 학술회의였음에도 에르디시의 헝가리 친구들은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같은 해에 헝가리 수학 연구소가 소련의 노선을 따라 창설되었다. 그 후 소장 레니가 책임을 맡은 이 연구소는 동유럽에서 선도적인 수학의 중심지이자 에르디시의 가장 중요한 도피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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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시대 수학자의 삶

1953년에는 미국이 에르디시의 영구적인 거주지가 될 것처럼 보였다. 미국 인디애나 주의 사우스 밴드에 있는 노트르담 대학의 수학과 학과장인 아놀드 로스(Arnold Ross)는 이례적으로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며, 1년간 지낼 수 있도록 에르디시를 초청한 것이다. 로스는 에르디시가 상급 과정 한 과정만을 가르치도록 조치했으며 거기다 긴급하게 여행을 떠나도 지장이 없도록 일을 도맡아 줄 조교도 붙여 주었다.

노트르담 대학에 있는 친구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신론자였던 에르디시가 로마 카톨릭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일하고 있다며 장난 삼아 놀리곤 했다. 그는 그곳에 머무는 것을 정말로 좋아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동료였던 멜빈 헨릭슨(Melvin Henriksen)은 회상 했다. 그리고 특히 ‘성직자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사실 단 한 가지 사실만은 그를 괴롭혔는데 이 곳에는 더하기 표지판이 너무 많다고 토로 했다. 헨릭슨은 에르디시와 함께 한 유일한 공동 논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즐겨 회상했다. 헨릭슨과 레오나드 길먼(Leonard Gillman)은 문제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었는데 에르디시는 이 분야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연구 도중에 그들이 부딪힌 집합론 분야는 자타가 에르디시를 전문가로 인정하는 분야였다. 그들이 에르디시에게 자기들의 문제를 보여 주었고, 에르디시는 이를 즉석에서 해결했다. 그래서 그에게 공동 연구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두 수학자들이 에르디시에게 자신들의 의문점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 때마다 그의 눈은 흐릿해 졌다.

그의 논문은 비표준 분석으로 알려진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가끔 알파벳 순서 때문에 부당하게도 종종 에르디시 및 그 외 사람들의 작품으로 인용되었다. 노트르담에서 지낸 1년 후에 그 전과 똑같이 좋은 조건으로 그의 직책을 무기한 연장해 주겠다는 외견상 에르디시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헨릭슨에 따르면 에르디시는 로스에게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고는 거절했다. 에르디시가 노트르담 대학에 남기로 결심하고 안 하고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또 한번 조라는 이름의 남자 때문 에 에르디시는 자신의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제거하겠다는 상원의원 조세프 메카시(Joseph McCarthy)의 신경질적인 캠페인이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에르디시는 1953년 7월 6일 처음으로 메카시즘이라는 불쾌한 느낌을 맛보았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친구를 방문중이던 에르디시는 부다페스트에 계신 어머니의 73번째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전화를 쓰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의 장거리 전화요금을 지불하는데 익숙해 있었던 에르디시의 친구들은 대개 짧게 끝내라는 말만 하며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친구가 이를 거절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화요금 청구서에 공산주의 국가로 전화를 건 사실이 기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거절이 겁쟁이의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친구로서 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1950년에 통과된 ‘맥캐런 국가보안법’에는 미국의 과학자들이 그렇게 두려움에 떨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미국을 방문하고자 하는 외국의 과학자들 또한 비자를 받으려면 굴욕적인 조사를 감내해야만 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노벨상을 수상한 뛰어난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랙(Paul Dirac)이 이 주장에 꼭 맞아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천문학자 오토 스트루(Otto Struve)는 무척 분개하면서 그런 잘못된 정책 때문에 미국의 과학 자들은 그의 방문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비자 신청을 꺼려 했다. 그 이유는 만일 기각당했을 때 그들의 정부가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히는 결과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과학 단체들은 외국인들이 쉽게 참석할 수 있도록 모임의 장소를 해외로 옮기기 시작했다. 미국 심리학 협회는 1954년의 국제 심리학 학술 회의를 뉴욕에서 개최하려고 했지만 결국 외국의 과학자들이 일시적인 입국 허가라도 얻으려고 시도할 때 겪게 될지도 모를 지연과 당혹감 때문에 캐나다 몬트리올에 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학술회의를 해외에서 개최하는 시도는 불행하게도 에르디시와 같이 미국에 사는 외국인 과학자들에게는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1954년에 에르디시는 4년마다 개최되는 대규모의 중요한 모임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국제 수학 학술 회의에 참가하고자 했다. 미국 시민이 아닌 에르디시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려면 반드시 재입국 비자를 받아야만 했다.

그가 미국을 떠났던 최근 두 번의 경험을 비추어볼 때 재입국 비자를 얻는 과정은 대체로 몇 통의 편지를 쓰고 관료들과 논쟁을 해야 하는 과정을 밟아야만 했다. 이번에는 맥카시와 맥캐런 법안 덕택에 이민국에서 그와 인터뷰를 하겠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디트로이트에서 인디애나 주 노트르담 대학으로 파견된 이민국 직원이 에르디시의 사무실에서 그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에르디시는 이민국의 배려를 고맙게 생각했지만 곧 뒤이어 벌어진 인터뷰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그 직원은 그 동안 미국 정부는 에르디시의 행동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왔다고 했다. 이를테면 에르디시는 두 외국인들과 함께 롱아일랜드에 있는 레이다 시설 주변을 기웃거려서 체포된 적이 있었으며 한 중국인 정수론 학자와 서신을 주고 받고 있었다.

헨릭슨이 지적했던 바와 같이 전형적인 사실 에르디시의 편지는 별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에르디시는 헝가리 과학원의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공산당원이 되었던 자신의 어머니와도 계속 편지를 주고 받고 있었다. 당시는 연좌죄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르디시와 연결 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의 성향이 결코 좋아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에르디시는 이민국 직원의 모든 질문에 보통 때와 같이 솔직하고 꾸밈 없이 대답했다. 헝가리 정부가 자유로운 여행을 허용한다면 헝가리로 돌아갈 것인가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칼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공산당 선언을 읽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그의 친구들에 따르면 에르디시는 언제나 좌익 성향이었지만 결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에르디시는 자신의 생존 문제 때문에 이제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이제 증명하거나 추론하고 있지 않을 때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즐겼다. 그러나 에르디시 자신은 결코 어떤 정당에도 속한 적이 없었다.

헨릭슨은 이에 대해 한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강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에르디시는 이러한 원칙을 공유하지 못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 든 제국주의 국가로 간주했고, 이들의 이름을 소문자로 나타내어 수학자로서 기호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주었다.

에르디시는 헝가리의 국민이 아닐 수는 없었지만, 떠돌아다닌 세월 동안에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지려고 시도한 적도 결코 없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저버리라는 요구에 대한 거부와 마르크스가 뛰어난 인물이라는데 대한 에르디시의 믿음은 그가 미국에 위협적인 공산주의의 동조자라고 미국 정부가 결정하는 데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결국 재입국 비자에 대한 그의 요청은 거부되었다. 에르디시는 변호사를 고용하고, 편지를 쓰고, 친구들의 도움을 구했으나 이민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르디시는 녹색 카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미국 체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미국을 떠나게 되면 그의 녹색 카드는 몰수 되어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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