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수학자 에르디시를 막은 사연에 대해 알아본다. 에르디시의 모든 미국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샤피로 역시 에르디시에게 정부와의 불화가 해결될 수 있을 때까지 미국을 떠나지 말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사실 그를 강제로 붙잡아 두는 것 말고는 그 어느 것도 그가 떠나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뛰어난 수학자 에르디시는 그런 사람이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비자는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며 에르디시는 암스테르담의 학술회의에 참석했다.

환영 받지 못한 에르디시의 길
그러나 당혹스럽게도 네덜란드는 그에게 오직 몇 개월 간만 유효한 비자를 발급해 주었고 영국은 그에게 입국을 허가조차 해주지 않았다. 에르디시는 이스라엘에서 도피처를 찾았는데 이 나라 헌법에 명시된 ‘귀환법’은 이민 와서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이교도를 포함한 모든 유태인이 소유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에르디시는 이스라엘도 또 하나의 소인배 국가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상황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의 시민임을 선택하였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 하이파에 있는 테크니온 대학에서 그가 출강하는 달에만 약간의 급료를 받는 영구 초빙 교수가 되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에르디시는 그가 1984년에 울프상으로 받은 5만 달러의 상금 대부분을 테크니온 대학에다 자신의 어머니를 기념하는 강좌 개설에 기증했다.
미국에 있는 에르디시의 친구들은 그를 위하여 편지도 쓰고 청원서에 서명도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미국에서 열리는 학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 비자를 발부해 달라는 그의 요청은 번번이 거절되었다. 에르디시의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출간된 회고록에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1959년 3월 25일에 에르디시를 위한 편지쓰기 캠페인에 선봉으로 나섰던 시라쿠스 대학의 수학자인 윌리엄 피어스(William Pierce)는 두 통의 전보를 받았다. 미국 국무성은 금일 오후 본인의 사무실로 헝가리 부다페스트 영사에게 에르디시의 방문 비자를 발급하도록 지시하는 전보를 보냈다고 알려 왔다.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노트르담 대학 수학과 학과장인 아놀드 로스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기인이며 많은 도움을 주는 우리의 동료를 대신 하여 부다페스트의 미국 영사에게 에르디시의 비자를 급송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내었다다. 그를 위해서 노트르담 대학에 체류하도록 초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트르담 대학이 에르디시와 함께 하려는 행운은 다시 한 번 기각 당하고 말았다. 험프리가 얻어낸 유예는 미국 콜로라도 주에서 열리는 미국 수학 학회의 모임에 참가하고 몇몇 연구회에 참석하는데 나 충분한, 매우 짧은 기간의 방문만을 허용한 것이었다.
헨릭슨은 퍼듀를 방문한 에르디시를 공항으로 마중 나갔을 때 그가 가진 짐이 작은 서류 가방 밖에 없는 것을 보고 놀랐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갈아입을 양말과 속옷, 다림질이 필요 없는 셔츠 하나, 그리고 약간의 논문과 인쇄 직전의 원고들이 들어 있는 작은 가죽 서류가방 하나만 달랑 가지고 여행 했다.
이후에 에르디시는 자신의 유랑 생활을 재개했다. 1962년 즈음에 에르디시가 친구들에게 분명 미국은 두 가지 외교 정책을 확고하게 표방하고 있다. 중공의 UN 가입을 저지하는 것과 폴 에르디 시를 미국에 입국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편지에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캐나다는 남쪽의 이웃 나라가 보여 주는 공포와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에르디시는 캐나다의 대학들을 자주 방문했다.
그럴 때면 미국에 있는 친구들은 망명중인 지도자를 방문하는 충신들처럼 기꺼이 그를 만나기 위해 캐나다까지 왔다. 그러나 에르디시는 오랫동안 한 장소에 머무는 법이 거의 없었다. 에르디시는 극히 미세한 입자들이 무작위로 아무렇 게나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위 브라운 운동을 수학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에서도 선구적인 전문가였다.
동시에 그 자신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다른 사람들의 예측을 불허하며 옮겨 다니는 마치 브라운 입자와 매우 흡사한 존재였다. 어떤 한 친구는 에르디시를 만나기 위해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에 찾아갔더니 이미 그가 다른 곳으로 떠난 것을 알고는 계속 에르디시를 추적하다가 캐나다를 횡단하게 되는 일련의 희극을 연출한 후에야 겨우 에르디시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에르디시의 어려운 처지는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캐나다의 한 신문은 미국의 철의 장막에 의해 가로막힌 에르디시의 처지를 표제 기사로 실었다. 비공식적인 에르디시 협의회를 개최한 30명의 미국의 수학 자들에 대해 언급한 또 다른 기사에서 미시건 대학의 수학 교수인 조지 피래니언(George Piranian)의 발언을 실었다.
그에 따르면 어느 하급 관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위스콘신 주의 한 상원의원 때문에 겁을 먹은 나머지 그 자신이 에르디시를 의심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얼마 전에 발사된 소련의 스푸트닉 위성 때문에 깜짝 놀란 미국은 마침내 수학과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스푸트닉이 어느 쪽이 진정 자신을 위한 것인지를 우리 정부가 인식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라 고 희망해도 좋을 것 같다”라고 피래니언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몇 년 후에는 편집증과도 같던 반공 의식도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에르디시의 친구들의 노력도 성과를 얻기 시작했다. 이민국은 다시 한 번 에르디시의 문제를 검토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걱정은 여전히 에르디시가 금지된 단체의 회원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남아 있긴 하였다. 그럼에도 에르디시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옛친구의 도움으로 자신이 속한 유일한 단체는 ‘미국과 영국의 시민 자유 연합’이라는 주장을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