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되시가 생각한 세계 최초의 여성 수학자인 히파티아

에르되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수학 이외의 것도 가르치려고 했다. 한 번은 우리 주변에 수학자는 왜 그렇게 적은지를 질문했다. 에르되시는 자신과 공동으로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서 여러 명의 여성들을 열거하며 중요한 것은 타고난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만일 아이들이 아주 영리 하면 수학을 하는 남자애들이 많겠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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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

에르되시의 어린 제자들은 골똘히 생각해 보고는 마침내 아마 그렇게 많지는 않겠단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 정말로 자신이 흥미있다고 여기는 것만 하기를 좋아한 일부 제자들은 자기가 수학 연구보다는 가르치는 일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에르되시는 포사가 수학 연구를 단념하고 교사가 된 것에 매우 실망했다. 그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며 불평하기도 했다. 그럴 때의 에르되시는 마치 하버드 법대를 우등으로 졸업한 뒤에 민중 변호사를 선택한 똑똑한 아이를 가진 자부심에 부풀어 있다가 실망한 부모 같아 보였다.

그러나 에르되시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제자는 훗날 커서 훌륭한 선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후 에르되시는 제자에 대해 말할 때면 분명히 건강하게 살아 있었음에도 고개를 저으며 그 아이가 그렇게 어린 나이에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에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잠시 다른 얘기로 넘어가 보자. 세계사에서 암흑의 시기라고 하는 중세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15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천 년 정도를 가리킨다. 수학사에서도 중세는 암흑의 시대였다. 이 비극의 시대를 앞당긴 장본인은 다름 아닌 로마 제국이었다. 고대 수학자는 세계 최초의 여성 수학자인 히파티아(Hypatia, 370?~415)의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그 막을 내렸다.

히파티아의 아버지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수학자 테온(Theon)이었다. 그는 수학사에서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에 주석을 달아 그리스 수학과 천문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당시 여성이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히파티아는 아버지로부터 수학 교육을 받았을 뿐더러 열정도 물려받았다. 그녀는 존경 받는 교사이자 문필가, 천문학자, 과학자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폭동이 자주 일어났다. 히파티아는 종교에 상관 없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그녀가 지지하던 신플라톤주의도 기독교와 대립되는 사상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정치적 긴장 상태의 초점이 되었다.

결국 그녀는 학교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의 비참한 죽음은 과학과 수학을 중시하던 고대 서양 문명의 운명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로써 수학사는 중세의 암흑 시대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천재이며, 철학자이고 공상을 그리는 사색가이다. 황망스러운 그녀의 죽음에 대해 에르되시는 몹시 안타까워 했으며 존경심을 표하였다.

본론으로 돌아와 에르되시는 기차와 비행기 그리고 이국적인 나라들의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여행 가방을 들고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삶을 살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60년 부다페스트에서 급히 모스크바로 그러고 나서 레닌그라드,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이르쿠츠크와 울란바토르를 경유하여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베이징에서 3주일 동안 옛 친구들을 만난 다음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를 탔고 다음에는 항저우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그리고 다시 비행기로 광둥(廣東)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 이번에는 홍콩으로 갔다. 그리고는 싱가포르로 그 곳에서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로 갔다. 그렇다고 해서 그 해가 특별히 바쁜 해도 아니었다.

리차드 벨먼(Richard Bellman)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 누구도 에르되시가 어디에 있는지 아니 어느 나라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에르되시가 1년 만에 모든 곳을 다녀 왔다는 것은 확신할 수가 있었다. 에르되시의 한 친구는 길에서 그를 우연히 만나자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수십 명의 수학자들을 만나고 수백 가지의 새로운 정리와 추론을 듣는 일에 지치기는커녕 에르되시는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연구 결과를 얻는 자극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젊은 수학자들과 나이든 수학자들의 모임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흥미로운 문제를 제안하고 그들의 연구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연구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다른 곳에서 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다녔다. 이런 형태의 의사소통은 편지보다 더 빠르고 더 효율적이었다. 그렇다고 에르되시가 마지못해 편지를 쓰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는 매년 깔끔하지는 않지만 읽기 쉬운 필체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학자들과 무명의 학생들이 보내는 질문에 똑같이 예의를 갖추어 신속하게 수천 통의 편지와 엽서로 답장을 보냈다.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애매모호한 수학의 참고 문헌에 대한 그의 기억력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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