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위 그래프에 대한 에르디시-레니의 논문이 발표된 뒤 그 주제에 대한 수백 편의 다른 논문들과 수많은 책들, 그리고 국제 학술회의 등이 이어졌다. 이들 연구가 현실에 응용 되었다고 해서 순수 수학자적인 관심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원래의 논문에서 이 점을 밝히고 있다. 무작위 그래프에 나타나는 구조는 순수 수학의 관점에서만 흥미로운 것은 아닐 것이다.

무작위 그래프이론이란?
사실상 그래프가 전개되는 양상은 국가, 혹은 어떤 다른 단위 집단의 통신 네트워크(철도망, 도로망, 전자 네트워크 체계 등등)가 전개 되는 양상을 어느 정도 단순화시킨 모델로 간주할 수도 있다.
더 복잡한 구조가 무작위로 발전하는 것을 고려해 봄으로써 복잡한 현실 세계의 성장 과정 예를 들어 생물의 유기적 구조와 같은 다양한 유형으로 연결된 복잡한 통신망의 전개에 대한 매우 합리적인 모델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40년 이상이 지난 후에 위의 마지막 말은 상당한 선견지명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산타페 연구소의 스튜어트 카우프만(Stuart Kauffman)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해 주는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무작위 그래프의 전개에 크게 의존했다.
카우프만의 모델에서 생명체는 무작위 그래프의 전개에 대한 에르디시&레니의 모델에서 나타나는 군락의 형성과 똑같은 필연성을 갖고 분자들로 이루어진 원시적 형태의 물질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카우프만은 최초의 지구 상황을 흉내내는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조작한 일종의 화학적 혼합물인 분자들로 이루어진 무작위 물질을 상상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그 물질은 아마도 우연히 짝지어진 분자들을 포함할 것이고, 촉매라고 불리우는 세 번째의 분자가 더해져서 새로운 분자를 형성할 것이다.
때때로 새로운 분자는 자신만의 짝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또 다른 촉매의 도움으로 비슷한 합성 과정을 통해 또 다른 분자를 만들어 내기도 할 것이다. 운이 좋다면 새로운 분자가 적당한 짝과 적 당한 촉매를 만나는 과정이 지속될 것이다. 그 결과는 데이지 꽃 모양처럼 이와 같은 상호작용들이 길게 연결된 상태이다.
만일 더 운이 좋다면, 이 사슬은 자기의 꼬리를 삼키는 뱀처럼 그 자신의 위로 고리가 묶여져서 화학반응의 자기 부양 구조, 즉 화학적 폐쇄 조직을 형성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화학 반응에서 나타나는 위와 같은 복잡한 자기 부양의 네트워크 카우프만이 자동 촉매 망상조직이라 부른 것는 순전히 수많은 우연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적어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카우프만은 있을 수 있는 화학 반응들의 네트워크는 분자를 꼭지점(nodes)으로 하고 촉매 반응을 변(edges)으로 하는 무작위 그래프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비교적 변의 개수가 적은 무작위 그래프가 분리 상태에서 연결 상태로의 위상 변환을 거치는 것과 같이 화학 물질의 무작위 혼합체도 연관성이 없는 분자들로부터 생물체로의 위상변환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카우프만이 보여 주었다.
카우프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작위 그래프에서 커다란 군락이 다소 갑작스럽게 크기가 변하는 것은 어린 아이 장난과 같은 수준의 위상 변환이지만 이것은 결국 생명의 기원에 귀착될 것으로 나 자신은 믿고 있다. 화학 반응 체계에서 충분히 큰 수의 화학 반응에 촉매작용이 가 해진다면 촉매 작용이 가해진 반응들이 이루는 광범위한 그물 구조가 갑작스럽게 결정화(結晶化)된다.
그와 같은 그물 구조가 자동 촉매 작용을 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즉 자기 부양을 한다는 것이 거의 확실한데 이는 곧 살아 있는 생명체로 판명된 것이다. 수학의 무작위 그래프의 전개는 외견상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자동 촉매적 체계의 출현이 어찌해서 실제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충분히 다양한 분자들이 한꺼번에 주어진다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복제가 가능한 화학 체계가 등장하게 된다.
나쁜 달걀이라 하더라도 암스테르담에서 여러 달을 보내고 나서 1948년 12월,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에르디시는 서방 세계로 다시 갈 수 있도록 교육부가 마련해 준 특별 비자로 부다페스트에 돌아왔다. 당시 그것은 특별 대우였다고 그는 회상했다. 친하게 지냈던 많은 친구들이 공포정치 속에서 살아 남은 것을 알고는 무척 기뻐했다.
투란은 미국에서 만났었지만 부다페스트 도시 공원의 무명인의 동상에서 만나곤 했던 다른 젊은 수학자들 몇 명과 그 밖의 친구들과 다시 만나게 되자 무척이나 기뻤다. 그러나 그가 가장 기뻐했던 일은 무엇보다도 어머니와의 상봉이었다. 옛날에 살던 집에서 어머니와 재회 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여전히 정열적이고 건강하신 것 같았보였다.
그러나 재회의 기쁨도 잠시 가장 가까운 친척 여섯명 중에서 오직 그의 어머니와 아주머니 한 분만이 살아 남았다. 거기다 더욱 악화되고 있는 정치 상황은 에르디시를 괴롭게했다. 대부분의 어린 시절 친구들처럼 그도 자유주의자였다. 그에게 이 용어는 평등에 대한 강한 믿음 그리고 인간애와 개인의 욕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뜻한다.
그러한 원칙은 정치 권력에 대한 깊은 의심과 결부 되어졌으며 이는 평생토록 그가 미국과 소련, 두 나라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원인이기도 했다. 1949년이 시작될 무렵 소련은 일련의 무시무시한 인민재판을 시작했다. 비록 이전부터 헝가리에 돌아와서 영원히 살겠다고 생각했던 에르디시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정치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에서 떠나 있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판단했다. 부다페스트에서 3개 월을 머문 후 에르디시는 얼마 되지도 않는 자신의 짐을 꾸려서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몇 개월 후 에르디시가 느꼈던 무시무시한 공포감은 친구 알파르가 체포되는 사건으로 현실화 되었다.
그는 인민재판에서 간첩죄로 처형당한 내무장관 라슬로 라직(Lászlo Rajk)과 연관 되었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이다. 알파르는 구리를 캐는 광산에서 4년간 고된 노역을 치르다가 1953년 스탈린의 죽음에 뒤이어 찾아온 해방기에 석방되었다. 그 후 몇 년 간 에르디시는 미국과 영국을 왔다갔다 하며, 대출과 단기 간의 강사 수당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이후 1950년 모든 공산주의 국가의 수 학자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수학 학술 회의가 부다페스트에서 열리며 전환점을 마련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