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의 유태인 수학자 폴 에르디시 일대기를 알아본다. 냉전의 상황 속에서도 폴 에르디시는 헝가리와 유럽의 앞날에 대해 걱정을 하였다. 때문에 친구들은 그가 수학자로서의 길을 가려 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격려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에르디시와 그의 친구들은 언덕으로 산책을 할 때 수학에 대한 토론을 하지 않으면 헝가리의 타락한 정치 상황을 분석해 보곤 했다.

수학자 폴 에르디시 추론
에르디시의 유태계 친구들은 대다수가 좌파 정치에 적극적이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그들은 거리에서 협박 당하고 대학에서도 쫓겨났으며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1925년부터 부모님도 그리고 자신도 결국 내가 외국으로 떠나게 될 것 같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에르디시는 회상했다.
그래서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나서 그는 헝가리를 떠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 에르디시의 부모는 아들이 독일에서 연구를 계속하기를 희망 했지만 독일의 정치 상황이 매우 나쁘단 것을 보고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논문 지도교수의 제안으로 에르디시는 영국의 수론학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장학금을 받는데 도움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에르디시는 과잉수에 대한 추론을 간단히 증명한 논문 사본을 같이 보냈는데 그것만으로도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충분한 연구비를 받을 수 있었다. 영국 왕립학회로부터 지급된 연구비 액수는 100파운드였다.
1934년 에르디시가 헝가리 파즈마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으며 그 때까지 학위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어린 축에 들었다. 9월에 그는 기차를 타고 난생 처음으로 헝가리를 떠났다. 그는 기차에서 다른 것은 고사하고 식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에르디시는 여행에 대해 다소 두려움을 느끼긴 했지만 되도록 많은 수학자를 만나고 싶어하는 그의 바람은 꺾이지 않았다. 맨체스터로 가는 도중에 그는 스위스 취리히에 들렀다. 1934년 10월 1일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인데도 그는 너무나 쉽게 정확한 날짜를 대곤 했다 아마도 취리히 일정이 인상적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에르디시는 두려움에 찬 최초의 여행이었지만 가능한 많은 수학 연구소를 돌아보려고 애썼다. 그는 그 곳에서 가장 중요한 공동 연구자가 된 젊은 독일인 수학자 리하르트 라도(Richard Rado)를 만났다. 라도는 저명한 수학자의 수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유태인인 그는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독일을 탈출해야만 했다. 에르디시와 라도는 1년 이상 수학 문제에 관한 서신 왕래를 해오고 있었다. 에르디시가 무한에서의 램지 정리에 대한 추론을 라도에게 보내자 라도는 이를 논박 했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이 역에서 만났을 때 그들이 달려간 곳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식당이었다.
토론에 열중한 에르디시는 빵에 버터도 바르지 않고 먹을 정도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머무는 동안 에르디시는 만나는 수학자들마다 수학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을 뿐더러 사실상 잘못된 것이라고 판명된 재미있는 자신의 추론을 제시하며 그들에게 도전하였다.
그러나 무심결에 이루어진 에르디시의 다른 많은 추론들처럼 때로는 이 문제 때문에 1년 이상 편지로 수학 문제를 토론하던 리하르트 라도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세드릭 스미스(Cedric Smith)는 후일 조금 억지를 부려, 미국 몬태나 주에서 시작된 나비의 날개짓이 인도의 계절풍을 불러일으키듯 에르디시의 자그마한 추론이 서구 문명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을지도 모른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교묘한 분할, 다시 말해서 한 가지 모양을 이루는 조각들이 다시 조합되어 다른 모양으로 될 수 있는 예를 들면 삼각형을 잘라 다시 조합하면 오각형이 되는 따위의 분할 방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에르디시의 분할 문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단순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정사각형을 더 작은 정사각형들로 나누는 것은 쉽다. 체스판은 하나의 정사각형이 64개의 더 작은 정사각형으로 분할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작은 조각들의 크기가 제각각 달라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는 화가 몬드리안에 필적할 만한 디자인이 될 것이다. 에르디시는 그런 분할이 불가능하다고 추측했다.
하나의 정사각형을 유한개의 작은 정사각형으로 분할할 때 적어도 2개는 크기가 똑같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추측을 할 수 있었을까? 하나의 정사각형이 어떻게 분할 되는지 혹은 어떻게 분할 되지 않는지에 대하여 어떻게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단 말인가? 보통 그러한 직관은 얼마나 오랫동안 그려 보고 시행착오를 했느냐로 좌우된다.
수학적 증명이 비록 순수한 논리에 기초한다고 해도 수학 그 자체는 상당한 정도의 관찰에 의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에르디시는 3차원에서 문제를 처음 보았던 경험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정육면체를 유한개의 작은 정육면체로 분할할 때 크기가 모두 다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놀랍게도 매우 간단하다.
우선 하나의 정육면체를 크기가 각기 다른 작은 정육면체로 분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정육면체의 각 면은 다른 크기의 정사각형으로 분할되어 이들이 정육면체의 겉면을 구성할 것이다. 특히 그 중앙의 어느 한 면에 위치한 가장 작은 크기의 정사각형을 보자.
이 정사각형은 모퉁이에 자리잡을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모퉁이에서 만나는 두 개의 모서리를 따라 인접한 두 정사각형이 크기가 더 크기 때문에 서로 겹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 작은 정사각형은 모서리를 따라 자리잡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크기가 더 큰 2개의 정사각형 사이에 끼여 있게 된다.
이 경우 인접한 두 개의 정사각형에서 튀어나온 모서리가 가장 작은 정사각형의 폭만큼을 둘러싸서 여백이 생기게 되고 이 공간은 훨씬 더 작은 사각형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가 있다. 하지만 처음의 가정에 의해 크기가 더 작은 정사각형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작은 정육면체는 면의 중앙쪽 어딘가에 자리잡을 수밖에 없으며 이 때도 더 큰 정육면체의 겉면을 형성하는 정사각형들에 의해 모든 모서리가 둘러싸이게 된다. 이는 크기가 가장 작은 정육면체의 윗면이 이웃한 건물들에 의해 모든 면이 벽으로 둘러쳐진 폐쇄된 정원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앞에서 언급한 정육면체의 면을 구성하는 정사각형의 경우와 같이 그 작은 정육면체의 윗면은 더 작은 정육면체로 뒤덮여 있어야 한다. 추론은 반복된다.